2023-01-06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저 | 양철북
출간일 : 2018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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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다볼수록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니 뽑는 풀도 나한테는 고맙게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풀 아니면 내가 뭣을 벗을 삼고 이 햇볕에 나와 앉았겠나. 그저 풀을 벗을 삼고 옥수수도 가꾸고 콩도 가꾸고 모든 깨고 콩이고 조이와 팥도 가꾼다. 그러면서도 뭣이든지 키우기 위해 무성하게 잘 크는 풀을 뽑으니 내가 맘은 안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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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고 밖에 나가면 백합 냄새가 향이 너무 확 난다. 참 귀엽고 만져보고 싶다. 하얀 백합이 보기에도 깨끗하고 즐거워서 사람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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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 모종을 심으면서 희망을 생각했다. 이 깨가 클 때 깨 대궁에 잎눈마다 새끼 가지가 차면서 크겠지. 또 가지 끝에 잎 피는 눈에는 꽃이 피어서 꼬생이가 생겨가지고 깨알이 날이 갈수록 여물지. 가을이 되면 다 여물어서 그제서는 낫으로 깨를 꺾어야지. 꺾어 세웠다가 한 십일 정도나 십오일 정도 되면 다 말라서 갑바 깔고 막대기로 털어서 키로 까불러서 한 이삼 일 말려서 두고 정도 맞게 나눠서 기름 짜서 먹고 나누어 준다. 그 생각하면 깨를 심느라고 허리가 아파도 참고 억지로 하루 해를 채우며 심고 가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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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뚝뚝 떨어진다. 다 매고 나니 맘에 시원하다. 김매고 돌아보니 깨가 좋아하는 게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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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때문에 남아나는 게 없다. 날씨는 늘 비만 오니 날래 여물지는 않고 새는 심하게 대들고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네. 왜 이리도 사는 것이 힘만 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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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도토리 까는 게 일이다. 망치로 깨서 깐다. 안 깨면 못 깐다. 반들반들해서.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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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보니 송이는 없고 땅이 불룩해서 송인가 하고 살살 파 보니 못 먹는 잡버섯이 나를 속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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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 송천리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18년 사이에 쓴 일기 중 일부를 발췌한 책이다. 어릴 때 글을 배우지 못하셨고, 부엌데기 시절 겨우 배운 글을 마음에만 가지고 있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고 난 뒤부터 도라지 판 돈으로 공책을 사 일기를 쓰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만물에 호기심이 가득하고 일하는 것을 즐기며 연민과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 더없이 자연친화적인 삶을 산 할머니의 일기를 읽으니 자연 앞에 겸허한 태도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할머니의 의지가 새삼 존경스럽다. (그것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보다 비교할 수 없이 힘든 삶이었는데도!) 시부모와 남편으로부터 오랜 세월을 학대당하고도 다들 죽고 나서 시아버지 묘소를 혼자 돌보는 그 마음씨라니. 
여성으로서의 강인한 정신력에도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역시 여자에게는 남편이 없어야....?ㅋㅋ 보면 볼수록 며느리하고 딸이 효도도 다 한다. 아들 자식은 보고 싶다는 말 아니면 거의 언급이 없는데 있어도 와서 밥이나 퍼먹고 갔다는 말 뿐이다.  
천원, 오천원, 만원을 살뜰히 기록하시고, 자식들이 오만원이라도 용돈을 드리면 큰 돈 생겼다고 좋아하시는 형편에 대구 지하철 참사 성금으로는 십만원이라는 큰 돈을 선뜻 내놓으셨다. "필요없는 것 말고 내가 아까워하는 것을 줘야 한다"시며 화재로 피해입은 사람들에게 아끼는 옷과 신발을 한 보따리 정리해 보내시기도 했단다. 참으로 다정하고 이타적인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읽는 내내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이 잘 느껴진다. 시장 장사꾼 여자에게도 헐값에 나물을 내주시면서 그 여자가 챙길 이문을 먼저 생각하시는, 새들에게조차 추운 날엔 무엇 먹고 사는지 걱정하는 마음을 내어주시는 온정 많은 할머니다. 할머니의 부지런한 사계절, 소박하고도 다정한 세계를 보며 울컥한다. 
나라도 늙은 여자들에게 야박하게 굴지 말아야지, 오늘도 다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