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9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저 | 한겨레출판

출간일 : 2018년 0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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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오래 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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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모단 껄이 아니라는 것, 모단 껄 되고 싶은 심정이 언감생심으로 보이리란 사실은 주룡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으니 도저히 모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반장 때문은 아니다.
반장 같은 것은 모단 껄 되기에 요만큼도 방해가 될 수 없다.
구남성의 박해를 받았으니 이는 도리어 모단 껄 되기의 제일보에 진입한 것이다. 
주룡은 그런 생각으로 남은 업무를 버티고, 기어이 집에 가서 울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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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자기가 무엇을 망설였는지 모르겠다. 제 온 열과 성을 다 바쳐 파업에 참여하는 것이 삼이를 위하는 길이고 옥이를 위하는 길이며 저 자신을 위한 길인 것을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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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운 것이라군 예서 배워준 교육밖에 없는 무지랭이지마는 교육 배워놓으니 알겠습데다. 여직공은 하찮구 모단 껄은 귀한 것이 아이라는 것.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 고무공이 모단 껄 꿈을 꾸든 말든, 관리자가 그 따우로 날 대해서는 아니 되얐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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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룡은 제 공장 근처에 달려 있던 걸개의 말을 떠올린다. 일하지 않는 자 집으로 돌아가라, 이제 보니 공장주, 자본가가 그 말을 훔쳐가려 한 게로구나. 정말로 일하지 않는 자는 저 자신이면서 파렴치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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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흰 광목을 훑는다. 그 빛나는 줄을 잡고 지붕 위로 올라가려는 주룡은 마치 선녀 같다. 달헌은 그 아름다운 광경을 감히 해칠까 봐 잠시 망설이다가 힘겹게 말을 건넨다. 올라가지 몰아요. 거기 올라가면 죽게 됩니다.

주룡은 답한다. 알고 있다고.

달헌은 제 머릿속에서조차 말을 듣지 않는 그 여자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본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처럼 빛나는 광목을 주룡은 단단히 붙든다. 사실은 두려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면서. 사실은 살고 싶어서, 그 누구보다도 더 살고 싶어서 활활 불타고 있으면서.

지붕 위에서 잠든 그 여자를 향해 누군가가 외친다.

저기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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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싸우는 여성이 아름답다고, 싸우는 여성을 동경한다고 생각해 왔다. "싸우려고 태어난 사람" 강주룡은 못 배운 자에 대한,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여성에 대한 편견들을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 낸 이다. 감히 말해보건대 여성의 온 일생이 저항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강주룡의 저항은 남성의 저항과는 결이 다르다. 고된 가사에, 독립운동에, 옥살이에, 시가의 핍박과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비난에도 꿋꿋이 자존을 지켜온 사람. 자신의 개인적 고난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연민하지 않고 가부장제와 식민주의처럼 먼 곳에 있는 이념으로 지레 좌절하고 상처입지 않았다. 앞에 놓인 현실을 그저 이겨낼 것만 생각하며 묵묵히 움직인 사람이었다. 
강주룡의 저항은 오로지 이타적이다. 자신에게 칼을 휘둘렀던 일본인 노인마저 끝내 같은 인간으로 여겼고, 아들의 부고를 들은 시모의 트집어린 모진 매질을 부러 인내해주기도 했다. 차마 이혼은 선택하지 못해 신념을 접으려는 연약한 동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대신 불사르겠노라 다짐해주는 우정도 있었다. "솔직한 말로 주룡은 나라가 무엇이고 독립은 또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를 지켜주지도 돌보아주지도 못한 나라가 독립은 해서 무슨 소용인가. 나라의 이름 같은 것은 내 알 바가 아니다, 내 가족이 굶지 않고 춥지 않게만 살면 됐지. 주룡의 생각은 그랬다. 떳떳할 것은 없지만 부끄럽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독립군 바람이 든 어린 서방에게 기어이 가려거든 저를 데려가라 우긴 것도 서방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었다." 애초에 어린 남편을 낯선 데 홀로 보내기가 걱정스러워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강주룡은 훗날 고무공장 노동조합장이 되어 투쟁하면서도 이념이나 사상 위에서 싸우지 않는다. "여태껏 자기가 무엇을 망설였는지 모르겠다. 제 온 열과 성을 다 바쳐 파업에 참여하는 것이 삼이를 위하는 길이고 옥이를 위하는 길이며 저 자신을 위한 길인 것을 왜 몰랐을까." "뉘기 하나 죽지는 않을까 무섭습네다. 내 목숨이 꺼지는 것두 무섭구, 다른 이가 죽는 것도 무섭습네다. 사람이 죽는 거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놈들이 무섭습네다." 그저 똑같이 하나 뿐인 누군가의 생명과 안위를 위하였을 따름이다. 새삼스럽지만, 여성의 투쟁사는 다르게 읽혀야 한다. 
조선 최초의 고공 농성자라는 것, 숱한 남성들 사이에서 드물게 기개를 펼친 여성 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강주룡은 그 자체로 강인한 캐릭터성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이었고, <체공녀 강주룡>은 강주룡을 성역화, 신격화하지 않으면서도 강주룡의 실존을 생생하고도 장엄하게 묘사하였다. 일제 강점 하에 노동운동을 하던 한 명의 여성의 삶은 2023년 현재에까지 유의미한 현대성을 획득한다. 정달헌은 강주룡의 투쟁과 사망을 회고하며 강주룡을 "선녀 같다"고 표현했다. 싸우는 여성은, 투쟁으로 자존을 쟁취하는 여성은 언제나 아름답기 때문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