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9 쇼코의 미소, 최은영

쇼코의 미소
최은영 저 | 문학동네

출간일 : 2016년 07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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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쇼코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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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쇼코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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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쇼코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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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떠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렇게 박혀버린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쇼코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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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돌봄으로 뼈와 살이 여물었고 피가 돌았다. 효도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부채감을 느꼈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더 등을 돌리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쇼코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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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쇼코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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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씬짜오, 씬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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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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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한지와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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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품에 안으면 모든 통증이 누그러졌고 다음날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났다. 세상의 누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밝고 예쁜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길 것인가.
그 시절은 갔지만 여자는 미카엘라에게서 받은 사랑을 잊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가 하늘 같다고 했지만 여자는 자식이 준 사랑이야말로 하늘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미카엘라가 자신에게 준 마음은 세상 어디에 가도 없는 순정하고 따뜻한 사랑이었다. (미카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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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미카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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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자는 지민이 서러움을 모르는 아이로 살기 바랐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다. 삶에 의해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민은 삶을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야야, 지민아, 너 마음 쓰지 말어.”
어느새 눈물을 그친 지민이 말자의 팔에 기댔다.
“너가 어른 되면 남자고 여자고 없다. 너가 여자여서 안 된다는 소리 듣거들랑 무식한 소리구나 하구 비웃어버려. 넌 뭐든 다 되고 뭐든 다 할 수 있다. 너 땐 남자구 여자구 마음 바른 사람이 잘 살 거여.”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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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궁금한 게 많은 아이였잖여. 할머니! 부르곤 재미난 소리들을 잘혔어. 개미들두 나처럼 이불 덮고 자? 하늘의 스위치는 누가 켜고 꺼서 아침이랑 밤이 와? 할민 그런 소릴 하는 너가 어디서 왔는지 신기혔었어. 너라는 애를 모르구 사십 년 넘게 살았었는데 그때 넌 어디 있었냐. 어디서 와서 이런 신기한 얘길 하는 거여.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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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소설에선 많은 엄마들이 딸을 몹시 사랑한다. 그들은 나이 어린 여자를 포용하는 나이 든 여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도 있다. <씬짜오, 씬짜오>의 응웬 아줌마나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의 순애 언니, <먼 곳에서 온 노래>의 미진 선배의 경우처럼 처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에서도 내리사랑과 같은 유대는 어느 때고, 얼마든지 발생한다. 그들의 내리사랑은 주변을 향한 애정과 관심, 공감능력에서 기인하면서 진실된 소통을 통해 또 다른 방향의 애정과 관심, 공감능력으로 거듭해 자라난다. 

<쇼코의 미소>에서 소유와 쇼코는 서로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태도를 가장한다. 다만 진심이 결여된 그 배려 때문에 둘은 오랜 시간 거리를 두고 지내게 된다. 소유와 쇼코는 각자의 할아버지들에게 애증을 느끼지만  그 할아버지들이 소천하고 난 뒤에야 연약한 자신들을 지탱해 준 것이 바로 그 할아버지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쇼코는 소유에게 말한다. "우린 이제 혼자네." 가족의 죽음을 통해 성숙을 겪은 두 여자는 비로소 무사히 '우리'이자 '혼자'인 존재로 독립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직접적인 소통의 제스처를 거치지 못할 경우 극복되지 않는 거리도 있다. <한지와 영주>에서 인종과 언어를 떠나 한지와 영주를 이어주던 것은 상상력이다. 한지는 일기장을 펴준 영주의 앞에서 읽지도 못하는 한글을 읽는 시늉을 하며 즉흥적으로 말을 지어내 영주를 웃게 만든다. 영주는 한지의 이야기를 듣고 한지의 삶, 한지의 삶 속에 깃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이해의 주체와 객체였던 두 사람은 한 번 멀어지고 나서 끝내 입 밖으로 화해를 시도하지 못하고 침묵 속에 이별한다. 

<씬짜오, 씬짜오>에서 '엄마'는 남편의 폭력적인 실언으로 인해 응웬 아줌마와의 우정을 잃은 뒤 응웬 아줌마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 율랴는 미진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진의 사망 소식을 먼저 듣게 되고,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해옥은 순애 언니와 불편하게 헤어지고 재회하지 못한 상태로 진작에 죽었을 순애 언니의 영혼을 만난다. 

<비밀>에서 간신히 완치한 암이 재발한 것을 알게 된 말자는 처음 암 완치 소식을 들었을 적 기뻐하던 지민의 얼굴을 떠올린다. "말자는 지민을 오냐오냐 키웠다. 소고기를 갈아 만든 이유식을 먹이고 예쁜 천을 떼다 재봉틀을 돌려 세상에 하나뿐인 옷을 입혔다. 부모는 맞벌이에 외동이었으니 쉽게 외로움을 탈까봐 있는 정 없는 정을 다 줬다. 딸 영숙에게는 해주지 못했던 일이었다." 말자가 지민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고 있는 영숙은 지민의 행방에 대해 말자에게만큼은 '지민이 중국 시골에 부임했기에 전화도, 편지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말자도 영숙에게 암 재발 소식을 알리지 못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와 영주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삶을 응원할 것이라는 걸, 말자와 영숙은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입장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응웬 아줌마는 옛 친구가 되어버린 엄마가 선물한 뜨개 모자를 오랫동안 쓰고 지낸다. 율랴는 미진을 대신해 미진의 후배이자 미진에게서 또다른 은혜를 입은 소은을 플랏메이트로 맞이해 솔직한 고마움을 나누게 되었고, 순애 언니는 영혼의 모습으로나마 해옥을 찾아와 진실로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말로 다 하지 않아 거리를 두게 되었어도, 느리고 조심스럽게나마 진심은 반드시 전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서도 서로를 잊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성의 사랑과 공감이 가지는 저력이기 때문이다. 

<미카엘라>에서 딸을 "미카엘라야" 하고 부르는 엄마는 삶 속의 사소한 모든 일에 끊임없이 감사를 표하는 사람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엄마는 그 스스로가 이미 자신이 믿고 따르는 성모와 같은 존재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임하여 주변을 굽어 살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엄마의 시선에서 딸은 어려운 형편에도 자기 힘으로 의젓하게 잘 자라주어 고마운 아이, (딸의 눈에 그저 "기생충과 숙주"처럼 여겨지는) 남편도 "누구보다도 근면"하고 "깨끗한 샘물 같은" 사람일 따름이다.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그 뛰어난 공감 능력과 자비심을 활용해 난생 처음 만난 할머니와도 "미카엘라"의 이름으로 기꺼이 연대한다. 엄마에게만큼은 찜질방 할머니의 친구인 입분 할머니의 손녀 '미카엘라'도 곧 자신의 딸 미카엘라와 똑같은 애정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딸인 미카엘라도 엄마를 따라, 엄마가 찾고자 한 또 다른 미카엘라와 그 조모를 따라 자연스럽게 광화문 광장으로 흘러간다. '미카엘라'는 '미카엘'의 여성형 명사이고 구약 성경 속 3대 천사장 중 하나인 미카엘의 이름은 라틴어로 '누가 신과 같은가?(Quis ut Deus?)'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