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7 레슨 인 케미스트리, 보니 가머스

레슨 인 케미스트리 1,2
보니 가머스 저/심연희 역 | 다산책방 
출간일 : 2022년 06월 09일 | 원제 : Lessons in Chem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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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그 옛날 1961년은 여자들이 오후마다 셔츠웨이스트 원피스 차림으로 이웃집 정원에 모여 수다를 떨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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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문제가 뭐냐면요, 이 세상 인구의 절반이 쓰이지도 않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연구를 완수할 만큼 물품을 지원받지 못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문제는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자들이 대학에 간다 해도 케임브리지 같은 곳은 못 다녀요. 그 말은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고, 따라서 동등한 존중도 받을 수 없다는 뜻이죠. 여자들은 맨 아래에서 시작하지만 더는 높이 올라가지 못할 거예요. 임금 차별은 두말할 것도 없어요. 이건 모두 애초에 여자들이 남자들만 받아주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어서 생긴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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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내 말을 멈추었다. 사실 그녀가 아는 여자 중 과학을 비롯한 여타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제껏 대학에서 만난 여자들은 흔히들 남편감을 만나고 싶어서 진학했다고 말했다. 참 당황스러운 대답이었다. 다들 술에든 약에든 취해서 일시적으로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쨌든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 대신 집에서 아기를 낳고 양탄자를 청소하죠. 그건 합법적인 노예나 다름없어요. 제아무리 가정주부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라 해도 스스로의 일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고요. 남자들은 아이를 다섯 명 키우는 엄마가 그날그날 내리는 중요한 결정이래 봤자 매니큐어를 무슨 색으로 칠할까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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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내가 배운 게 하나 있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복잡한 문제를 풀 때 언제나 간단한 해결책을 간절히 바란다는 점이야.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걸 믿는 편이 훨씬 쉽거든. 실제로 보이고 만져지고 설명할 수 있는 걸 믿기는 오히려 어려워. 말하자면 실재하는 자기 자신을 믿기가 어렵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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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계속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지금 들은 제안에 마음이 갔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스템을 굳이 뛰어넘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싫었으니까. 애초에 시스템을 바르게 만들면 안 되는 거야?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것도 정말 싫었다. 호의란 결국 꼼수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겐 목표가 있었다. 제길, 왜 그냥 멍하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건데? 그렇게 앉아 있기만 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아무 데도 못 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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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나는 왜 여자들이 결혼하면 중고차 바꾸듯이 옛 성을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어. 성은 물론이고 가끔 이름마저도 잃어버리잖아. 존 애덤스 부인! 에이브러햄 링컨 부인! 마치 자신의 예전 모습은 가주어처럼 치부하고 새로 얻은 남편의 이름으로 진짜 사람이 된 것처럼 여기지. 피터 딕먼 부인이라니. 무기징역 선고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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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하지? 여자가 나한테 임신을 운운해? 네가 대체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
그녀는 그 질문에 놀란 듯 대답했다.
"그야 저는 여자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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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에 그림을 새긴 예술가는 한 번도 한눈판 적이 없었을까? 실수로 염소 대신 독사를 그렸던 적은 없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실수한 걸 그대로 놔두었을까? 분명히 놔두었겠지.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삶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니겠는가? 끝없이 일어나는 실수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게 삶이다. 그래, 엘리자베스는 그 점을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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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엘리자베스를 멋대로 휘두르고, 만지고, 지배하고, 입 다물리고, 교정하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어 했다. 왜 남자들은 자신을 평등한 인간으로, 동료로, 친구로, 동등한 존재로, 하다못해 그냥 길거리에 지나가는 낯선 사람으로도 봐주지 않는 걸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인 다음 뒷마당에 묻어놓았다가 발각된 범죄자를 맞닥뜨린 게 아니고서야 누굴 처음 봤으면 당연히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여겨야 하는 것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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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여성이 남성보다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나 남성이 여성보다 더 높다는 생각은 생물학이 아니라 문화에 근거한 사상이에요. 그 모든 논의는 '분홍색과 파란색'이라는 두 단어에서 시작되죠. 바로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게 치솟아버린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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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6시 저녁 식사>는 인간의 공통점인 화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시청자들이 이제껏 배워온 사회규범, 즉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저렇다' 식의 케케묵은 관념에 저도 모르게 얽매여 있더라도, 우리 방송은 문화적 단일성을 넘어서 생각하도록 격려해주는 겁니다. 분별력을 갖추고 과학자처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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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6시 저녁 식사>를 통해서 화학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여자들이 화학을 이해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시작할 테니까요."
로스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저는 원자와 분자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로스 씨.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진짜 규칙 말이죠. 여자들이 이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면 그들을 위해 창조된 세상의 그릇된 한계를 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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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의 기본은 변화잖습니까. 변화는 당신의 신념 체계의 바탕을 이루고요. 변화는 좋은 겁니다. 우리에겐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해요. 우리는 현 상태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곤 하죠. 하지만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당신의 경우에는 오빠의 자살과 캘빈의 죽음 같은 일은 사실 언제나 일어나요. 엘리자베스, 사건사고는 항상 생깁니다. 아무 이유 없이 말이죠."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인정했다.
"가끔 왜 오빠가 세상을 떠났는지 이해가 돼요. 이런 일이 다 일어나고 보니, 나도 가끔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웨이클리는 <라이프>의 기사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 마음 압니다. 하지만 저를 믿으세요. 당신의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문제는 당신이 이 세상을 뜨고 싶다는 데 있지 않아요."
엘리자베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가 살고 싶어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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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용기는 변화의 뿌리라는 말을요. 화학적으로 우리는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압니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짐하십시오. 무엇도 나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규정하지 말자고. 누구도 더는 성별이나 인종, 경제적 수준이나 종교 같은 쓸모없는 범주로 나를 분류하게 두지 말자고. 여러분의 재능을 잠재우지 마십시오, 숙녀분들. 여러분의 미래를 직접 그려보십시오. 오늘 집에 가시면 본인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시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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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주인공의 불행서사는 아주 흔하다. 여성의 삶은 남성들이 만들어낸 방해와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실제로 보통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위대함은 개인사의 불행을 지나쳐버리는 데에 있다. 불행이 엘리자베스를 덮쳐오는 순간엔 엘리자베스도 무척 고통스러워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결코 주저앉거나 체념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지배하려고 한 마이어스 박사의 골반을 HB연필로 쑤셔버렸고, 도나티 박사의 해고 통지서를 앞에 두고도 그가 바라는대로 울지 않았다. 실험실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주방을 때려부수고 실험실을 직접 만들었으며 남성성의 상징(인 그 하찮은 것)을 디밀어 자신을 위협하는 필 레벤스멀의 눈앞에 30cm 길이의 요리용 식칼을 휘둘러 주었다.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그렇듯 엘리자베스 역시 묵묵히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며 나아갈 뿐이다. 언제나 '화학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그래서 아주 중요하다. 그래야만 딛는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여성이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여성이 결혼과 육아, 가정의 굴레에 갇혀 일종의 고기능 가전제품으로만 작동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여성은 가전제품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정의할 줄 아는 가전제품은 없다. (곧 나올 것도 같지만?) 엘리자베스는 모든 인간이 "탄소, 수소, 산소"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화학식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모든 논의"가 "'분홍색과 파란색'이라는 두 단어에서 시작"된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엘리자베스가 마지막 방송에서 말한대로 "화학은 변화"이며 "용기는 변화의 뿌리"다. 마침내 해리엇이 자신이 조언을 구했어야 할 대상이 신부가 아니라 변호사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잡지에 기사를 싣던 로스보다도 자신이 더 잡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보그>에 로스의 원고를 부쳤을 때 해리엇의 변화도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것,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파악할 것. 편견과 차별을 마주했을 때는 "'아니오'라는 말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할 것. 엘리자베스의 화학 입문 강의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이제 엘리자베스는 화학진화 연구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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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보니 가머스는 60대 초반 나이에 첫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로 문단에 데뷔했다. 야외 수영을 즐기며 실제 조정 선수로도 활동 중이다. 그리고 지금은 예순 여섯 살이다. <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영국에서 데뷔작 사상 가장 높은 계약금인 200만 달러에 출판권을 계약했다. 애플TV에서 브리 라슨 주연의 TV시리즈를 제작 중이라고 한다. 동력은 역시 운동일까. 운동을 열심히 해야 인생도 튼튼히 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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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인 케미스트리>에는 <라이프>와 <보그>가 아주 상반된 성향의 잡지로 등장한다. (실제로도 상반된 성향이 맞다.) 평소 <라이프>는 여러 사람의 삶에 관한 르포를 싣는 진지한 잡지, <보그>는 가벼운 패션지로 은근히 낮잡아봤던 것이 사실이다. 여성지야말로 여성들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담아온 잡지였는데 그걸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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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부생일 때 김유정 작가의 작품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자 김유정 생가와 문학관에 답사를 간 일이 있다. 어제 그 김유정 작가가 생전에 심각한 수준의 스토커이자 여성혐오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유정의 첫사랑으로 거론되어 온 명창 박녹주가 그 대상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지식 또한 철저히 남성 세계 안에서 조작된 지식이었음을 또 한 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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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인 케미스트리>에 등장하는 위대한 여성의, 가려진 이름들.
Mileva Einstein 밀레바 아인슈타인
Esther Lederberg 에스더 레더버그
Nefertiti 네페르티티 왕비
Sojouner Truth 소저너 트루스
Amelia Mary Earhart 아멜리아 에어하트
Rosa Parks 로자 파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