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3 마르타의 일, 박서련

마르타의 일
박서련 저 | 한겨레출판
출간일 : 2019년 0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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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무슨 상관이야. 너나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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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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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이 온통 삐그덕거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댓글 내용들이 자꾸 재생되었다. 어찌어찌 사람 행세를 하고는 있지만 사람으로서의 본질적인 기능,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상실된 것 같은 느낌을 가누어가며 부랴부랴 카페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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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늦잠을 자고 교회에 간 엄마와 경아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가끔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어느 날 예수가 그 자매의 집에 방문했는데, 언니인 마르타가 예수와 다른 손님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할 동안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 앞에 앉아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는 이야기.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이리와서 언니의 일을 도와달라고 했더니 예수는 오히려 마르타를 나무라며, 마리아가 지금 하는 일이 마르타 당신의 일보다 덜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던가. 그런 식이다. 신데렐라의, 콩쥐의, 마리아의 자매는 나쁜 사람으로 기록된다. 선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르고 시샘이 많은 자매가 있다. 그렇다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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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아가 보내준 사진들을 생각하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최후를 맞을까 자문하게 되곤 했다. 대단히 영예롭거나 기억할 만한 죽음 같은 건 상상하기도 어렵고 딱히 끌리지도 않았다. 조용하고 평범한 시체가 되는 일에도 사실은 상당한 운이 필요했다. 재수가 없으면 끔찍하게, 우스꽝스럽게, 원치 않는 장소에서 믿을 수 없이 민망한 상태로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대해 나는 필요 이상으로 자주,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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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경우 자존심은 실용적인 감정이 되지 못한다. 내게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자존심이 센 편이라는 평가를 종종 듣고,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때에 자존심을 앞세울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결국 뭔가를 혼자서 해내야 할 때가 많았던 것은 자존심이 세서가 아니라 도움을 청해도 좋을 만큼 믿음직한 사람을 선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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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경아의 죽음은 자살이었고, 실제로 경아가 했던 행동들을 복기해보아도 거의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아는 살해당한 것이었다. 자살했지만 살해당했다. 나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경아를 죽게 만든 인간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아주 집요하게 고민했다. 무엇이 필요할까.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야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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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잃은 채로도 생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만약 경아가 20킬로그램쯤 더 무거웠다면, 차해경의 프로필에 나와 있듯 73킬로그램쯤 나가는 사람이었다면 경아는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잘 모르겠다. 알코올 분해 능력이 그렇듯 체내 산소 운반 능력도 체중에 비례하리라는 건 딱히 의학적 근거가 있는 생각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준서는 회복됐다. 회복되어서 래퍼에게 임리아의 죽음에 대해 모른다는 거짓말을 했다. 의식을 잃은, 자기보다 20킬로그램쯤 가벼운 여자에게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부정했다. 73킬로그램 남자는 살고 53킬로그램 여자는 죽었다. 의식 유무보다도 이게 더 큰 차이로 여겨졌다. 경아도 73킬로그램이었다면 살아 있었겠지, 라는 생각.
그렇지만 경아가 정말 73킬로그램이었다면, 이준서는 경아를 자기 차에 태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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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마리아한테 창피를 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이 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요. 예수는 평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나요? 일관성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일만 생각하면.”  

익명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나로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한 셈이었다. 조금 후에 익명이 입을 열었다.  

“예수께서 마르다를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귀하게 생각하셨다는 증거는 신약 곳곳에 있습니다. 다만 그날, 마르다를 나무라신 것처럼 보였던 날에는 마르다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겁니다. 예수께는 늘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고, 그 일화의 기록자인 누가라는 제자도 그 자리에 있었죠.”
나는 창밖으로 스쳐 가는 가로등들을 바라보며 익명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당시 문화에서 여자가 남자들처럼 가르침을 받는 것은 금기 사항 중 하나였습니다. 여자는 정식으로 글을 배울 수 없었던 조선 시대와 다를 게 없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발치에 앉아 가르침을 듣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걸 보기 거슬려 한 쪽은 언니 마르다였을까요, 제자들을 비롯한 다른 남자들이었을까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마르다는 아마도 남자들의 눈총을 받는 마리아가 안쓰럽고 불안해서 부엌으로 피하게 하고 싶었겠지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언뜻 마르다를 나무란 것처럼 보이지만, 어떨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르다를 안심시킬 만한 말씀이죠. 마르다, 너의 일도 귀하지만 마리아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받는 일은 아주 좋은 것이다. 누구도 이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 자리에서 마리아를 노려보았을 남자들 누구라도.”  

“하지만 성경에 그렇게 써 있지는 않았잖아요.”  

“그 일을 기록한 누가라는 사람도 남자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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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역에서 내려 고시텔로 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걷는 동안 내가 마르타고 경아가 마리아라고 생각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마리아는 흔한 이름이었다는 익명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마리아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이다. 그중에는 나쁜 마리아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익명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마르타도 될 수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신앙은 고사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조차 거의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르타였다. 경아가 마리아라면 나는 마르타가 되어야 했다.  

그다지도 그 애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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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레기 주제에 귀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왜 경아였을까. 어차피 얼굴이 중요한 거였다면 아무나 만날 것이지. 결국 남들이 귀하게 생각하는 걸 갖고 싶으니까 경아 같은 애를 건드리는 거면서, 왜 남들처럼 귀하게 여겨주지도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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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작가의 소설은 <체공녀 강주룡>을 먼저 읽은 바 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마르타의 일> 역시 무언가 일을 해내는 여성의 분투기를 다룬다. 전작에서 1930년대 여성들이 그러했듯 이번에는 2019년의 여성들이 사회와 남성으로부터의 폭력과 위협에 신음하고 있다. 
임용준비생 수아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동생 경아의 죽음을 파헤친다. 경아의 사망을 둘러싼 모든 정황이 수상한 일 투성이라 논리적인 수아의 눈에 전혀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아의 장례식에서 수아를 일깨운 사람은 익명의 남자다. 수아와 익명은 "자살했지만 살해당했"던 경아의 그 날을 복기하며 경아를 죽음으로 몰고간 자를 향해 함께 사적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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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죽일 것처럼 싸웠으면서도 수아는 경아를 하나뿐인 동생으로 많이 사랑했다. 경아를 가끔은 얄미워했지만 경아가 본성은 착하고 여리기 그지없는 아이인 것을 아는 수아는 자꾸 경아를 생각한다. 앞날이 창창한 수아는 자신의 미래가 걸린 일을 앞두고서도 경아의 복수에 매진한다.

익명은 어긋난 형식으로나마 경아를 이해하려 노력한 사람이고, 수아를 지지하는 유일한 남성이고, 장애인이다. 익명은 경아에게 “연심인지 경외심인지” 모를 감정으로 경아를 무척 사랑한 것처럼 그려지지만 여성이자 타인인 수아의 눈에는 그저 미친 스토커로 보일 때도 있다. 수아에게 익명은 복수를 도모하는 동지이기도 하지만 함께 있을 때 수아의 등허리가 푹 젖도록 식은땀을 나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익명도 남성이기에 경아를 온전히 이해하거나 순수하게 사랑할 수는 없었고, 끝내 경아의 비밀을 모두 알아내지는 못한다. 수아로부터 모든 정보를 공유받지도 못한다. 하물며 장애가 없는 보통의 남성(이준서, 래퍼 등)은 더더욱 여성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약자인 여성에게 남성은 결코 편안을 제공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작가의 단호한 의사 표시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반면 카페 언니는 “이용할 사람으로 날 떠올려서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라고까지 하는 "좋은 사람"이다. 카페 언니는 수아의 복수를 알고 있으면서도 언급하지 않고, 수아의 사적인 정보를 지켜줄 줄 알며, 수아의 방어적인 말과 행동에서 수아의 진심을 읽어낼 줄 아는, 시야가 넓고 자상한 인물이다. '배려하며 사랑하기'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여자만이 여자를 제대로 사랑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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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웃기는 말이지만.. 나도 이직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라 임용 준비를 하는 수아의 규칙적인 생활상이 대단하고도 근사해 보였다. 칼 같은 루틴, 큰 일(?)을 병행하면서도 잃지 않는 평정심, 매사 침착한 태도와 자기 세뇌, 수업 시연 날의 순발력까지 구직자에게 수아의 일상은 무엇 하나 귀감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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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와 익명이 복수를 마친 뒤에도 그들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사실이 세상의 정의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나에게도 무척 위안을 준다. 하지만 경아의 죽음 이후 두 사람은 결코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익명은 일을 끝내고 나서야 본래의 이름을 되찾는다. 운전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제서야 겨우 윤명환 전도사로 앞으로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봉사활동을 하며 사는 그에게 운전 면허 박탈은 또 하나의 장애가 될 것이다. 정당하다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사적 복수를 완성했지만 수아는 평생 그 죄의식을 떨치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기이하리만큼 행복한 와중에도 종종 자신의 모진 대꾸가 마지막이 되어버린 경아와의 문자메시지를 떠올리거나, 이준서의 모친이 등장하는 악몽을 꾼다. 끝내 수아의 앞으로 도착해버린 "피에 젖은 운동화 한 짝"은 내내 수아를 따라다닐 것이다. 어쨌든 사람의 목숨이란 적어도 그 운동화만큼은 무거운 것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