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1 당신의 4분 33초, 이서수

당신의 4분 33초
이서수 저 | 은행나무 

출간일 : 2020년 07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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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마침내 이기동은 당면한 삶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 케이지가 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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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버지를 관찰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술 마시며 하는 모든 희망적인 말들은 사실 이루어질 가망성이 거의 없는 것이며, 그걸 절실히 깨달은 사람만이 술을 마시고 그런 얘기들을 늘어놓는 거라고.
그는 술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인지, 사람이 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희망이 사람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만은 그의 아버지를 보건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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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서른다섯이 되었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분노는 즐거움처럼 할당량이 이미 정해져 있어 십대와 이십대 시절에 그것을 모두 채운 그녀는 더 이상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이 변했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지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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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귓가를 스치는 불협화음, 소음에 가까운 온갖 악기들의 소리를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음악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발생하는 것을 사랑했다.’  
로마의 철학자 황제는 말했다. 존 케이지 역시 이 말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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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뭔가가 그들 곁을 막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기차처럼 생긴 뭔가가. 시절? 아마도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했던 한 토막의 시간체일 것이다. 그 시간체가 그들 곁으로 되돌아왔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시간은 그러고 보면 절대로 선형이 아닌 것이다. 그가 알고 있던 시간은 시간이 아니었고, 미처 몰랐던 시간이 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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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설의 법칙에 대한 그의 믿음은 한결같았는데 소실점을 향해 가듯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면 결코 결말에 도달할 수 없고, 그것은 손을 내려놓는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끝을 내는 것은 손을 멈추는 행위가 아니라 이야기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멈추는 것이다. 나이 든 동물이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듯이. 저항이나 소란 없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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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서른다섯의 회사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이 놓일 자리를 직접 정했다. 맨 끄트머리였다. 여자는 맥주를 주문하더니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 조금씩 홀짝였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 책을 만지려 하면, 그녀의 눈길에 감전될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어쩌면 원한을 담은 내용일지도 모르겠어. 이기동은 그녀가 돌아가면 그 책을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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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손님은 남자 대학생이었다. 다행히 대학생은 말이 많은 성격이었다. 이기동에게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 했다. 800매나 되는 소설을 2주 만에 썼다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세상이 알아보는 둔재가 되느니, 알아보지 못한 천재가 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의 작품은 매우 전복적인 형식이어서 읽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이기동은 그가 가고 난 뒤에 그 책의 첫 장을 들춰보았다가 현기증을 느꼈다. 띄어쓰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의도한 것이겠지만 밥 딜런이 아닌 이상 이런 글은 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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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부끄러웠다. 여기까지 걸어온 자신의 삶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한 권의 책으로 요약되어 그의 눈앞에 놓여 있는 삶이.  그러나 가끔은 행복했다. 그에게 낙선작을 맡기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모든 책은, 그게 잘 쓰였든 아니었든지 간에 판단은 보류하고 어딘가에서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 누군가 읽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인생은 조금도 공평한 것 같지 않지만 그는 그러한 인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므로 가게는 유지되어야 했다. 그는 커피 값을 300원 올렸다. 맥주 값은 500원 올렸다. 그리고 값을 올린 이유를 써놓았다. 솔직하게. 이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치였노라고. 몇몇 손님들은 원래부터 너무 쌌다고, 원래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그를 강하게 옹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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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과 반복 서술되는 존 케이지는 재생 시간 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연주곡 '4분 33초'의 작곡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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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4분 33초>는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전위예술가 존 케이지와 아무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안 팔리는 소설가 이기동의 이야기를 병치한다. 이기동이 존 케이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첫 문장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쭉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 의사, 공무원의 꿈을 차례로 접고 이기동이 "낙지"로 화하는 순간 마침내 이기동은 존 케이지만 한 존재론적 의의를, 현재성을, 소설 주인공으로서의 아우라를 획득한다. 얼핏 이기동은 순응적이고 평범한 성격으로 보이지만 결코 순응적이거나 평범한 인물은 아니긴 하다. 작품은 비루한 현실과 절망적인 상황 안에서도 은은한 낙관과 (냉소적일지언정) 유머러스함을 놓지 않는데, 그런 점이 작가를 작가일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설 속에 묘사된 존 케이지의 에피소드들-아내 그레이스라든지, 아버지의 이야기라든지 이런 내용들이 작가의 허구라는 점이다. 그래도 되나? 아무튼 재미있었다.